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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其他分类其他2024-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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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시: 김성덕            방송: 서태문

제2회 훈춘 문학의 길―중강자송이문학축제

     금년은 아버지가 백세 되는 해이다. 우리 곁을 떠난 지도 어느덧 27년 세월이 흘러갔지만 그 모습과 추억은 여전히 머릿속에 남아있다.
     아버지는 유복한 사람이었다. 입 살이나 하는 가문에 4녀 일남 독자로 태어나 그 년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인이 꾸리는 농업 회사에 채용되어 거기서 광복을 맞았다고 한다.
     일본이 투항하고 광복이 나자 그때 잘 사는 집에 반반한 옷 견지를 헐값으로 거둬들여 깨끗하게 씻고 알뜰하게 정리하여 등 짐에 지고 떠돌아다니며 팔며 깨알 돈을 모으던 할아버지 계급을 확정하는데 정부는 골머리를 앓았다고 한다. 뒤 끝에 획분 규범에도 없는‘소상인’으로 명칭을 달아 호구부에 적어 넣었다고 한다. 유별난 가정 성분은 그 후, 대물림하며 후대들을 괴롭혔다.
     아버지는 마음이 어지고 고지식한 분이다. 문화대혁명 때 당치도 않는‘일본특무’로 몰려 직

직무가 해제되고 공작도 중지 당했다. 어느 날, 아버지는 집에 들어서자 신 벗기 바쁘게 밥상을 펼쳐 놓고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한 밤중 되도록 끝을 보지 못했다. 평생 써보지 못한 문자를 거기다 터무니도 없는‘일본특무’사실을 글로 써서 받치라고 하니 그때 애간장 태우던 아버지의 그 모습 지금도 눈앞에 선히 보는 것만 같다.
    며칠 후, 아버지는 끝내 이불 짐을 꿍져지고 단위 소 사양 칸에 갇히고 말았다. 낮이면 고깔모자를 쓰고 투쟁 대회에 시달렸고 밤이면 지친 몸으로 소 사양 칸에 여물을 주었다. 신심 고통에 아버지 몸은 형편없이 허약해졌다.
     그 동안 어머니는 아버지가 갇힌 지도 오래고 소식이 없자 너무 걱정되어 조직을 찾아 상면을 요구했다. 그때 단위 반란파는 대면을 거절하며 원래 일본말에 익숙한 어머니를‘일본 특무’죄명을 쓰고 있는 아버지와 곁들며 인신 모욕까지 하였다.

    ‘지식분자는 노동개조를 받아야 한다.” 는 연달아 덮치는 정치형세 하에 아버지는 또 농촌으로 내려갔다.
     아버지는 정직하고 근로하며 말수 적은 사람이었다. 농촌에 내려갔던 몇 해 동안 아버지는 거의 매일 사원들과 함께 농사일에 종사했다. 봄 이면 고무장화를 싣고 모판에 볏모관리를 방조했고 여름이면 바짓가랑이 걷고 논밭에 화학비료를 쳤으며 가을이면 탈곡장에 볏짚을 날랐다.
     어떤 간부는 농촌에 오자부터 각항 회의와 관철집행 에 매일 바삐 보냈다. 그러나 아버지는 정치에 불문했고 또 관심도 없었다. 선전대 간부가 내려오면 사원들과 함께 학습에 참석했고 회의가 끝나면 그 길로 일터로 나가군 하였다.
    그런데 정치 불문인 아버지의 책장에는 문화대혁명 전부터 마르크스의《자본론》1, 2권이 언제나 보기 좋게 꼽혀 있었다. 알고 보면 소랭이 두드리며 참새 잡던 그 년대 철학을

을 학습하는 정부 호소 하에 의무적으로 산 것이었다. 첫 페이지에 아버지 명함이 적혀진《자본론》저작은 손때 한 페이지 묻지 않은 채 지금 우리 집 책장에 고물처럼 보관되어 있다.
    따지고 보면 매번 정치운동은 아버지 운명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한때는 그렇게 우쭐거리고 지독했던 그 사람은 집을 찾아 무릎 끌고 귀 쌈 들이 밀며 용서를 빌었고 특무로 몰리우고 농촌에 쫓겨났던 아버지는 지식분자는 생산력의 주요한 성원으로 마땅히 중국공산당에 가입해야 한다는 정부 권고에 호응하여 퇴직을 앞두고 중국공산당원에 신청해 나섰다.
    그때 우리가 본 아버지 정신 상태는 정말로 홀가분한 모습이었다. 입당 적극분자로 각종 활동에 적극 참여하며 놀랍게도 평생 모르던 노래도 함께 따라 배우기 시작했다. 영화 주제곡‘红星照我去战斗’은 당시 단위마다 의무적으로 보급하던“혁명가요”인데 당시 아버지가

가 싹 틀린 한어 발음으로 맞지도 않는 박자에 이상한 목소리로 따라 부를 때면 누구나 배를 끌어안고 웃었다. 그래도 아버지는 감각이 좋아서 명절이나 친척들이 모여 앉으면 언제나 그 노래를 찾곤 했다. 아버지 부르던 그 노랫소리는 지금도 귀속에서 쟁쟁 들리어 오는 같다.
    아버지는 멋진 남자였다. 광복 전부터 고모부는 연길에서 제일 먼저 사진관을 경영하였다. 연고로 우리 집에는 아버지 사진들이 많았다. 양복에 넥타이를 걸치고 라사천 외투에 목수건을 두른 아버지가 백양나무를 배경으로 저 멀리 바라보며 찍은 사진은 영화배우의 뺨 칠 정도다.
    네“아버지 졸업생 사진에 제일 멋진 사람을 골라 짚으면 그게 바로 너 아버지다.”
    이상 분들은 늘 말 하군 하였다.
    아버지는 깔끔한 분이였다. 매일 세수와 함께 면도질도 꼭 하셨으며 남들과는 달리 코 구멍 털 하나라도 밖으로 나오면 꼭 뽑아야 시

시름을 놓았다.
    어찌된 영문인지 왼손잡이 아버지는 손재간이 소문나게도 없었다. 못을 박으려면 꼭 밖으로 튕겨 나가지 않으면 휘었다. 나무 밑 끝까지 못을 박는 것을 누구도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우리는 부모가 다투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술을 반가워하는 아버지가 술상에서“얼량 더 떠오라.”고 혀 꼽은 소리 할 때면 안 된다고 막는 게 어머니와 다툼이었다.
    아버지의 좋은 세월은 오래 가지도 못했다. 농촌에서 고생하다 관직을 회복하고 얼마 안 되어 직장암 오진을 받고 큰 병원을 오가며 한때 마음고생도 하였다. 그 후 정년퇴직하고 얼마 안 되어 뇌경색으로 중풍을 맞은 후 불편한 몸으로 집에서 닭 모이나 썰며 지내왔다.
    아들은 결혼하여 이제껏 부모를 한 집에서 모신다는 자부심으로 어머니가 옆에서 아버지를 돌본다는 턱을 대고 늘상 공작이 바빴고 행

행사도 많았다. 나에게 생명을 주신 아버지 생전에 애짭짤하게 효도하지 못했다. 나이가 들수록 그저 절절 해지는 마음뿐이다. 그러나 뒤 늦은 후회를 한들 그게 무슨 쓸모가 있는가?
    아버지는 73세를 일기로 이 세상을 하직하였다. 일생에 큰소리 한번 쳐보지 못하고 오점 하나 남기지 않고 그렇게도 평범하게 살다가 조용히도 하늘나라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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