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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의 눈물

其他分类其他2024-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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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의 눈물

초대수필: 채영춘   육성: 서태문

제2회 훈춘 문학의 길―중강자송이문학축제

     어렸을 때 내 기억속에 아버님은 눈물이 없는 분이셨던것 같다. 아니, 어쩌면 내가 보지 못했거나 당신께서 눈물을 보이지 않으셨거나 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딱 한번, 아버님은 나에게 어쩌다가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내 유년시절 아버님과 나와의 유일한 마지막 단독 외식자리에서였다.
      그날 아버님이 나를 데리고 간곳은 동시장안의 어느 자그마한 전병가게였다. 기름에 갓 튀겨낸 전병을 사서 내 앞에 놓아주시고 손수 젓가락을 내손에 쥐여주시는 아버님의 류례없던 자상함에 많이 당황했던것 같다. 평소에 줄곧 두려운 존재로만 여겨왔던 아버님이 나만을 음식가계에 끌고온것도 그렇고 나를 챙겨주시느라 신경쓰시는것에 괜히 불안감같은 것까지 살짝 엄습해왔다. 그래서 전병을 먹으면서 몰래 훔쳐본 아버님의 안색이 례사롭지 않으시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순간 당신의 눈시울에서 번쩍이는 그 무엇이 포착되였다. 눈물이였다. 흘러 내리지는 않았으나 분명 눈굽에 맺힌 눈물이였다. 처음 대하는 광

광경이라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냥 못본체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내가 유년시절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목격한 아버님의 눈물이였다. 때는 1964년 가을철의 어느날, 우파라는 정치적모함으로 권고퇴직까지 강요당하신 아버님이 기약없는 해외망명을 결심하고 철부지 장남인 나에게 베푼 “작별외 식” 자리였음은 후에 알게 된 일이다. 그러나 그자리에서 아버님은 눈물만 보였을 뿐 별말씀이 없으셨다. 며칠후 아버님은 표연히 두만강다리를 건너시였다. 그때 아버님 년세는 쉰한살, 나는 열세살이였다.
    “눈물은 무서운 언어이요, 무한한 애정의 웅변이며 말로 표현하기엔 너무나 벅차다”(폴로크)
     차차 셈이 들면서 그날 아버님 눈굽에 맺혀 번쩍이던 눈물이 자꾸 가슴에 맞쳐왔으며 그 눈물은 당신이 꺼내지 않으신 천만마디 조언과 당부보다 더 짜릿한 무언의 “계시록” 으로 줄곧 나를 동반해왔다.
     눈물이란 때론 엄청난 의미를 지혜롭게 생략

략시키는가하면 새로운 그 어떤 느낌을 파생시키기도하는 묘한 예술과 같다는 생각을 아버님의 눈물이 가르켜주셨다. 철부지 어린자식에게 장황하고 난해한 조언과 부탁보다도 억제된 눈물이 더 효과적일수 있다고 판단하셨는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아버님의 판단은 나한테 적중한 셈이다. 오랜 세월 나는 아버님의 눈물이 주는 그 의미를 나름대로 해독하고저 애쓰며 아버님 무언의 조언에 충직해왔으니깐.
     그로부터 17년 후, 조선회령에서 있었던 아버님과 나와의 짧디짧은 사흘간의 “리산가족상봉” 자리에서였다. 어머님을 모시고 살아온 그 동안의 비극적인 삶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리시던 아버님은 더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셨다. 당신의 정치명예 회복과 관련된 조직의 결정을 전해들으셨을 때 한동안 먼산을 조용히 응시하시며 멍한 표정을 짓더니 자식앞에서 끝내 오열하시고말았다. 1959년에 우파분자 루명을 쓰시여 장장 22년, 가슴속에 묻어오셨던 그 한(恨)이 이 순간에 작렬

렬하신 것이다. 묵묵히 흐르는 두만강을 눈아래에 두고 참으로 오랜만에 실컷 터쳐내는 울음이셨다. 17년 전 연길전병가게에서 보이신 눈물이 조언과 애정의 난류였다면 17년 후 회령오산덕에서 쏟아내는 눈물은 그 동안의 울분을 해소하고 쌓였던 콤플렉스를 씻어내는 격류였다고 할수 있었다.
     그때 아버님은 일흔을 눈앞에 둔 고회의 늙은이로 변해있었고 나 또한 삼십대를 넘긴 애아버지로 되여있었다..
      2년 후, 19년 해외은거의 참담한 삶을 접고 아버님은 19년 전 건너가셨던 두만강다리를 다시 건너 오매불망 그리던 가족의 품으로 귀환하셨다. 그날 “도문교두에서는 눈물없이는 볼수 없는 이 세상 가장 특별한 리산가족상봉, 한 망명작가의 원대 복귀 현장이 펼쳐졌다. 아버님도 울고 가족친지들도 울고 작가 문우들도 울고 관객들도 울고 모두 울었다”(필자:《아버님의 귀환》)
    인간체내에 비치된 눈물량이 한정돼있다면 아버님의 눈물의 샘은 아마 그날 도문교두에

에서 바닥나지 않았을가 생각해본다.
      귀국하시여 운명하기까지 14년동안 아버님은 어머님과 자식들, 손군들속에서 천륜지락을 누리며 더 바랄것 없는 만년의 삶을 보내시고 계셨다. 그러면서도 나는 어쩐지 아버님한테서 막연하게나마 그 무언가를 은근히 기다리고 계신다는 눈치를 느낄수 있었다. 당신의 창작노트 구절에서, 우연히 내뱉으시는 말씀에서 나는 이외로 아버님이 내심속으로 당신을 불구덩이에 밀어넣은 몇몇 인간들에 대해 관용을 베풀기 위한 기다림을 깔고있음을 깨닫게 되였다. 잔혹한 정치적모함으로 당신의 작가인생을 철저히 파멸시키고 단란한 가정을 붕괴 직전까지 몰고간 “사람잡이” 선수들에 대해 아버님은 너그러움을 베풀 정신적준비가 돼있었던 겄이다.
     렬악한 사회적환경이 인간상실을 가져온다는 점은 무리가 아닐것이다. 작가도 사람이니 과오가 있기 마련이다. 자기가 저지른 과오를 뉘우치고 떳떳히 작가적량심으로, 작가적 방식으로 사과한다면 역시 받아드릴수 있는

는 일이다—
       아버님은 아마 이런 생각을 하셨으리라.
     이같은 기대로 아버님은 그 몇몇 건재한 “사람잡이” 선수들의 사죄용기를 14년동안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을 것이고 늦게라도 이런 인간들이 아버님 앞에서 작가적량지로 사과했더라면 아마 아버님생전의 마지막 눈물은 다름아닌 이 관용의 자리에서 흘러내렸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님의 이 마지막 기다림은 허물어졌다.
       반우파투쟁의 앞장에서 아버님을 생매장한것도 모자라 아버님 께서 해외망명하시던 시기 아버님의 어린 자식에 대해서까지 비인간적저주와 비난으로 일관해온 ht은 끝내 아버님과 그 가족앞에 나타나 사과 할 용기를 잃고 어눌하게 생을 마쳤다.
      그 대신 연변문단 반우파투쟁의 주역이였던 hk는 아주 뒤늦게나마 문단의 한 정중한 자리에서 아버님께 사죄하는 진 지함을 보이며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아버님이 살아계셨다

다면 아마 그 분의 사과를 받아주고 용서하는 아량을 베풀었으리라 확신하며 나는 아버님을 대신하여 그의 속죄의 마음을 받아 드렸다. 아버님생전에 있어야 할 사과의 자리가 아니여서 몹시 아쉬웠지만 마지막까지 속죄의 한마디 말도 없이 그 무거운 마음의 빚더미를 저 세상까지 짊어지고 간 비속적인 소인배에 비길 때 그분의 사죄용기는 가상하지 않겠는가? 아버님께서도 구중천에서 관용의 눈물을 지으셨으리라 생각한다.
     아버님의 눈물은 억울함에서 비롯되였다. 억울함에서 생성된 오랜세월의 눈물을 아버님은 관용이라는 인격으로 깨끗히 희석하여 날려버리려했던것 같다.
      그런 여유있고 결백한 마음으로 아버님은 지금 슬픔도 번뇌도 눈물도 없는 저 세상에서 꼬마둥이들과 함께하는 “병아리” , “아기별” 로 영원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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