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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国·蜀汉

其他分类其他2021-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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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国·蜀汉

巴蜀文化系列讲座 — 第一期

主办 四川师范大学校团委 延世大学孔子学院

파촉 문화 시리즈 강좌 : 제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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巴蜀大地是人类文明的发祥地之一。巴蜀文化源远流长,已有5000余年的发展历程,在中国上古三大文化体系中占有重要地位,与齐鲁文化、三晋文化等地域文化共同构成辉煌灿烂的中国文明。为促进中韩文化交流,增进相互理解,让韩国朋友感受巴蜀文化的魅力,自2020年12月起,延世大学孔子学院和四川师范大学校团委联合推出了“巴蜀文化在线系列讲座”。
同时,我们通过制作电子读物的方式,让更多朋友了解巴蜀文化的精彩内容和文化内涵。
本读物包括中文版和韩文版,为每期讲座讲稿全文。仅供爱好者学习交流,非公开出版物,非商业用途,如转载请提前征得主讲教师同意。

파촉의 땅은 인류 문명의 발상지 중 하나입니다. 파촉 문화는 5천여 년의 유구한 발전 여정을 거쳐 중국 상고시대 3대 문화 체계 중 주요한 지위를 지니고 있으며, 제나라와 노나라 문화, 삼진 문화 등의 지역 문화와 함께 찬란한 중국 문명을 이루고 있습니다. 한중 문화 교류 촉진 및 상호 이해 증진과 더불어 한국의 여러분께서 파촉 문화의 매력을 느끼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해, 2020년 12월부터 연세대학교 공자아카데미와 쓰촨사범대학교 중국 공산주의 청년단 위원회는 공동으로 ‘파촉 문화 온라인 시리즈 강좌’를 열었습니다.
이와 함께, 전자책 제작을 통해 더 많은 분들께 파촉 문화의 정채로운 내용과 문화적 깊이를 알려 드리고자 합니다. 본 도서는 매 회 강좌의 강연 원고 전문을 중국어와 한글 버전으로 수록하였습니다. 학습 및 교류 목적의 비공개 출판물로 비상업적 용도로만 제공되며, 옮겨 실으실 경우 사전에 강연자의 동의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刘双怡,历史学博士,毕业于首都师范大学,四川大学历史文化学院博士后。现为四川师范大学历史文化与旅游学院教师,硕士生导师。主要研究方向为宋史与西夏史。现已出版专著《<天盛律令>与<庆元条法事类>比较研究》一部,发表学术论文若干篇。
金彬那丽,四川大学文学与新闻学院中国现当代文学专业博士研究生,文学硕士毕业于韩国延世大学中语中文系。主要研究方向是中国现当代文学及文化现象。

류솽이: 서우두사범대학에서 역사학 박사 학위를 받은 후 쓰촨대학교 역사문화학원에서 박사후 과정을 밟았다. 현재 쓰촨사범대학교 역사문화 및 관광학원 석사 지도 교수로, 주요 연구분야는 송사(宋史)와 서하사(西夏史)이다. 기 출판된 전문 저작 『「천성율령(天盛律令)」과 「경원조법사류(慶元條法事類)」 비교 연구』 1부가 있고, 다수의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한편 학술 논문 여러 편을 발표하였다.
한글 번역 담당자 김빛나리: 쓰촨대학교 문학 및 신문학원 중국현당대문학 전공 박사과정 재학중이다. 연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졸업 후 같은 과 대학원에서 중국문화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 근현대문학과 문화현상을 연구하고 있다.

第一期主讲老师

제1회 강좌 강연자

目 录

一、中文版 —— 三国·蜀汉
       1. 陈寿 ——《三国志》
       2. 武侯祠 ——刘备与诸葛亮
       3. 关羽
       4. 张飞
       5. 赵云
       6. 三顾茅庐
       7. 空城计
二、韩文版 —— 三国·蜀汉
       1. 진수(陳壽) ——『삼국지(三國志)』
       2. 무후사(武侯祠)
           ——  유비(劉備) 와 제갈량(諸葛亮)
       3. 관우(關羽)
       4. 장비(張飛)
       5. 조운(趙雲)
       6. 삼고초려三顾茅庐
       7. 공성계(空城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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各位同学朋友大家好,我是四川师范大学的历史老师刘双怡。
 欢迎大家来到这一期的线上文化交流讲座,这一期的主题是三国,那么接下来请同学们跟着我一起探游蜀汉遗址,品读三国故事。
提到三国,同学都会想起陈寿的《三国志》,陈寿,著名史学家,一个专为三国志而生的人。
在工作上,他担任过很多职务,在将军旁边管过文书,做过秘书,做过随从等。蜀汉后期黄皓非常专制,陈寿不同意他的做法,所以多次被贬,过得不太如意。

三国·蜀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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当时编写三国史书的人,除了陈寿,还有别的人。但是其他人撰写的三国时期的史书相继散佚,只剩下陈寿的《三国志》是保存的最完整的。有人认为《三国志》跟《史记》和《汉书》有同样重要的地位,后来的人读到的最多的是陈寿写的三国正史。
陈寿活着的时候,他的书并不是太有名,但是今天回头看,之所以他的书那么有影响力,跟他丰富的经历有很大关系,他在职场上看到的、听到的东西都为他的写作积累了丰富的素材。
特别值得一提的是,他在西晋王朝管过档案,使得他有很好的机会阅读并搜集各种历史资料。所以,他的经历是写出优秀三国正史的重要原因。
公元223年刘备去世了,安葬在了成都的惠陵。下图展示的就是纪念刘备的汉昭烈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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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概到了西晋的时候,普通的百姓为了纪念诸葛亮,又在汉昭烈庙的旁边修建了武侯祠。
后来明代的蜀王朱椿把这两座祠庙重新建在了一起,这就是我们今天看到的武侯祠,这也是中国唯一一座君和臣合在一起的纪念祠庙。
民国时期的诗人邹鲁先生写了一首诗,“门额大书昭烈庙,世人都道武侯祠;由来名位输勋业,丞相功高百代思”。

意思就是,因为诸葛亮在历史上做了很多功绩,加上他身上有很多优秀的品质,让他在老百姓心目中有着很高的地位,所以人们觉得没有必要严格遵守君臣之间的礼仪,所以大家都叫“武侯祠”。

除了成都的武侯祠,中国大陆还有两处比较重要的武侯祠。
一个是位于今天中国陕西省汉中市勉县的武侯祠。比成都的武侯祠修建的早,公元263年,刘禅下诏立祠。该武侯祠位于诸葛亮北伐去世的定军山下,祠靠近诸葛亮墓——武侯墓。
另外一个南阳武侯祠,坐落于中国河南省南阳市卧龙岗上,初建于魏晋时期,有1800多年历史,是刘备“三顾茅庐”发生地,诸葛亮躬耕南阳所在地。南宋绍兴八年(1138年),岳飞北伐经过南阳武侯祠时,得知宋高宗与金议和,悲愤挥泪书写诸葛亮前后《出师表》。
到了公元809 年(唐宪宗元和四年),有一位节度使叫武元衡带着下属来武侯祠祭拜,表达他对诸葛亮的崇敬的情感,他命令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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时担任节度使掌书记(相当于今天省长的机要秘书)的裴度写一篇文章,并刻成碑文来纪念诸葛亮。

裴度在文章一开始就这样写道:“度尝读旧史,详求往哲,或秉事君之节,无开国之才,得立身之道,无治人之术。四者备矣,兼而行之,则蜀丞相诸葛公其人也。”
意思是:我裴度读了很多史书,发现了很多有德有才的人。他们当中,有的人具备臣下对君主的很忠诚的品德,但是却没有帮助君主管理混乱局面的才能;有的人知道如何对待人和事的方法,但缺乏管理百姓的策略和能力。如果说有谁能兼备这四种美德,并能用它们来实现自己的政治理想,就只有蜀汉的丞相诸葛亮了!”
一是诸葛亮有侍奉君主的气节。
诸葛亮愿意出来工作的时候,曹操已经通过控制天子号令天下诸侯的方式,占据了当时三分之二的领土。当时刘备的势力很薄弱。在这种情况下,诸葛亮没有一点犹豫就加入了刘备的阵营。

在辅佐了刘备后,又尽心辅佐刘备的儿子刘禅,直到公元234年,在北伐的前线去逝。
一直到去世前,诸葛亮都在用尽心力为国家贡献自己的力量,直到心脏停止跳动,这是他最令人尊敬的地方。不仅如此,他的后人也为了国家奉献了自己的生命。
二是他有难得的开国之才。
在诸葛亮加入刘备阵营的时候,刘备的势力还很薄弱,军队的人数很少,将领也只有关羽张飞赵云。
在诸葛亮隆中对策的指导下,只用了十四年的时间,刘备就成为了天下三分之一的霸主,并且在公元221年,成功地在蜀国(今天的成都)建立了一个新国家。刘备的成功也跟诸葛亮的智慧的密不可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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下图这尊刘备像是武侯祠供奉的最大的人像,头上戴的叫“天平冕冠”,身上穿的是黄袍,手上捧着的叫“朝天圭玉”,样子看起来很慈祥,也很有帝王像。

公元263年,魏国大军向蜀国进攻,刘禅看见这样的状况,有了想投降的想法,刘谌知道后就一直劝刘禅,应当带着蜀国的战士和敌人抵抗,可是刘禅却向邓艾投降了。
刘谌见刘禅向敌人投降,觉得国家亡了没指望了,回到家里把自己的妻子和儿子杀了后,去昭烈庙哭诉后,便自杀殉国了。
刘禅投降后被安置到洛阳。有一天司马昭把刘禅请过去吃饭,宴席上安排了很多娱乐表演的节目,司马昭问刘禅是否还想念蜀国,居然满脸堆笑的说到:“此间乐,不思蜀也”。
后人对刘禅这种“乐不思蜀”的行为极为不满,便不立刘禅的塑像了。

刘备像的左侧是他的孙子刘谌的像。可是为什么立了刘备的孙子不立刘禅的塑像呢?

刘备临死前特意拉着诸葛亮说;“若嗣子可辅,辅之,如其不才,君可自诩。”也就是说看一下刘禅是否有当皇帝的能力,如果有,那你就辅佐他,如果没有,你就可以取而代之,自己当皇帝。
可是刘备这话说来容易,可要让诸葛亮真这样做,却是难上加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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因为中国自古的宗法是先立嫡立长的,刘禅再懦弱无能,也是刘备的嫡长子,所以理应立刘禅为继任之君。而随意换一个皇帝,很有可能会引起当时的朝政动荡,更不要说诸葛亮自立为君了。
虽然诸葛亮自己有当领导的才干和实力,但是名不正言不顺,诸葛亮自然不会这么做。再加上我们说诸葛亮是一个从古到今侍君之节有忠贞不二操守的人,他也一定不会做出违背自己道德、良心和背弃刘备对他信任的事情。

关羽的这尊雕像有两米高,神情非常严肃。作为刘备团队里最重要的将领,关羽做人非常忠诚,作战也非常勇猛。他一直跟着刘备。有人用丰厚财物诱惑他,他都拒绝了。
不仅如此他还看许多书,懂得很多道理,在战场上英勇杀敌,抓住了于禁,杀了庞德,他的故事一直被后人传颂。

公元200年(建安五年),曹操出兵攻击刘备,刘备战败了,去投奔袁绍。在战乱中刘备和关羽走散了,关羽为了保护两位嫂嫂被迫向曹操投降了。
曹操很重视关羽,希望能招他进自己的军队,还给他封了一个官位叫“汉寿亭侯”。但是关羽发过誓要与大哥刘备一起进退,并且表示不会留在曹营,不过他答应要报答曹操的厚恩之后才离去。
后来在曹操与袁绍的白马之战中,关羽为曹军斩杀了袁绍的大将颜良。他报答了曹操的厚恩之后,把曹操送给他的汉寿亭侯印还有金银珠宝都封存起来,带着两位嫂嫂打败阻拦的敌人,经历许多困难终于回到了刘备身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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关羽的一生都在解释什么是忠义:一方面是对钱财不惧诱惑,对君主很忠诚;另一方面,是有情有义的报恩之心,只要对自己有恩德,就算是仇敌,他都必定会报答。

平时大家所熟悉的关羽形象大多为枣红脸、手里拿着大刀的模样,这里为何是全身贴金,头戴冕旒的帝王装扮呢?
这与他因忠义而受到历代众多帝王的加封有关,他的忠义对后世影响很大,后代的封建统治者极力的推崇他,不断给他加封,将其视为忠臣的典范,以鼓励臣下效忠王室。
在明代万历42年的时候已经被民间百姓和政府联手加封为关帝爷了,也就是南天门三界震威抚远降魔大帝关圣帝君。
下面我们来说说张飞,大家知道刘备、关羽、张飞三兄弟的关系特别好,关羽和张飞走到哪里都会在刘备的左右。张飞也在刘备身边立下了很多功劳。
大家还记得张飞在长坂坡一战,用他的大嗓门击退了敌军吗?下面我们就来说说张飞的大嗓门。

在历史上对张飞的大嗓门有许多记录,在原有的基础上再加上后人的描述,那是如何讲述的呢?据说当年是刘备打了败仗之后派张飞去断后,张飞便只身一个人来到当阳桥。来到当阳桥做的第一件事就是断桥,也就是把桥提前拆断,并不是一嗓子喊断。
断了桥之后又瞪着眼睛在桥头说了一句话,说:“我就是张飞,谁要是不服,就过河咱们单挑,来看看谁更厉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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结果河对面的曹军却犹豫了,因为第一,张飞已经拆断桥了,要过去不容易,第二再一看这位战士看上去有大将的风采,大家都不敢随便上前迎战,因此,张飞在当阳桥成功的阻断了曹军,拖延了时间使得刘备顺利逃脱。
接下来我们来说一说赵云。公元208年,在当阳长板坡,赵云单骑杀入敌阵,救护了甘夫人与刘禅。在刘备夺取汉中之时,他用空营计吓退了曹魏追兵,事后刘备称赞到:“子龙一身都是胆啊”。

赵云在很多三国爱好者的心目当中应当属于一个白马银枪,威风凛凛的少年将军,是个大帅哥,男神级别的人物,可我们看到的赵云塑像,典型的一个退休老干部的形象,穿着文官服饰,而且须发洁白。
其实熟悉三国的同学应该了解,三国时期的那些战将真不容易,没有几个大将是善终的。单从三国演义来说,吕布,是被绞死的;关羽张飞二人,身首异处。马超,四十七岁抑郁而终,黄忠、张辽、徐晃都是被乱箭射死的,而真真正正喋血沙场并落得善终的,只有赵云一人。这里对赵云塑老者形象是对他善终最大的一个表彰。

最后我们讲几个蜀汉的相关的小故事。首先我们来讲一下三顾茅庐的故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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官渡大战前,曹操打败了刘备。刘备只得投靠刘表。但刘备不甘心做别人的手下,想出来干一番自己的事业,于是到处打听有哪些厉害的军师。
刘备请教了有名的谋士司马徽,司马徽向他推荐了诸葛亮。刘备有一位非常器重的手下叫徐庶,他告诉刘备,隆中有个奇才叫诸葛亮,如果能得到他的帮助,就可以得到天下了。
刘备一听眼睛一亮,急忙说:“好啊,那你赶快把他请过来吧。”徐庶说:“不行的,他这样有才华的人,只有将军您亲自过去把他请过来,才显得有诚意。”
刘备见司马徽和徐庶都如此推崇诸葛亮,于是就和关羽、张飞带着礼物,到隆中去拜访诸葛亮。当他们赶到卧龙岗,谁知诸葛亮刚好出游去了,书童也说不准什么时候回来。刘备只好回去了。
过了一段时间,刘备、关羽和张飞再次准备去拜访,这时正好是冬天,天气非常的寒冷,半路上突然下起了大雪,张飞想劝刘备返回,等天气好点再来,刘备却非常坚定,于是三人冒着大雪又来到诸葛亮的家。谁知诸葛亮此时和朋友一起出去了。
一连两次都没有见到诸葛亮,关羽和张飞都有些不耐烦了,纷纷劝刘备放弃,刘备却摇摇头,耐心的开导两位兄弟,终于把他们说服了。
转眼又过了一段时间,刘备选了个好日子,再一次来到隆中。这次,诸葛亮倒是在家,但是正好在睡觉。
刘备让关羽、张飞在门外等候,自己在台阶下静静地站着。过了好几个时辰,刘备站得两腿发软、浑身乏力,诸葛亮才醒来,刘备见诸葛亮醒了,连忙向他请教平定天下的办法。

诸葛亮给刘备分析了天下的形势,说:“北让曹操占天时,南让孙权占地利,将军可占人和,拿下西川成大业,和曹、孙成三足鼎立之势。”刘备一听,非常佩服,请求他的帮助。诸葛亮答应了。
从此以后诸葛亮一心一意的辅佐刘备,使刘备的势力逐渐强大,成为三国时期三分天下霸主中的一位。

有一次,魏国得知蜀国的战略要地西城驻守的军队很少,只有不到一万士兵,于是派大将司马懿率领十几万军队前去攻打。
蜀国得知魏国的军队正迅速向西城赶来后,非常紧张。以一万士兵抵挡十几万敌人,就像用鸡蛋去砸石头,肯定会失败的。可是调集军队增援又来不及。西城在这种情况下非常危险,大家都把希望寄托在一向有很多计谋的军师诸葛亮身上。

接下来我们来讲空城计的故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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诸葛亮思考了很久,终于想出一个比较完美的计谋。他命令城内的平民和士兵全部撤出,暂时躲避到一个安全的地方,然后大开城门,等候敌人的到来。
魏国大将司马懿不久就带兵包围了西城,但令他吃惊的是,本来以为会有许多士兵驻守的西城却城门大开,城墙上也看不到一个守卫的士兵,只有一个老头在城门前扫地。
正在他很疑惑的时候,看到城楼上出现一个人,正是他的老对手诸葛亮。只见诸葛亮整理了一下自己的衣服,在一架预先放好的古琴前坐下来,随即悠扬的音乐从城楼上传下来。
魏国的将士都愣住了,在敌人把城门都包围起来,非常危险的时候,蜀国的军师诸葛亮却弹起了琴,不知道这是怎么回事。
面对开着的城门和弹琴的诸葛亮,一向很狡猾的将军司马懿一时不知道该怎么办。他想,城里必定埋伏了大量兵马。
这时,只听得城楼上传来的琴声由舒缓渐渐变得急促起来,仿佛暴风雨就要来临一般。司马懿越听越不对劲,他怀疑这是诸葛亮发出调动军队反攻的信号,于是急忙下令撤退。
魏军迅速撤退,就这样,蜀国的西城没有损失任何东西,安全度过了这次的危机。这就是诸葛亮有名的“空城计”。
今天我的讲述就到这里。感谢大家的聆听。

* 参考阅读书目:
[1] 陈寿著,裴松之注:《三国志》,中华书局,1959年
[2] 黎东方著:《细说三国》,上海人民出版社,2000年

巴蜀文化讲座—第一期

三国·蜀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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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사천사범대학교 역사 교수 류솽이입니다. 그리고 저는 통역을 맡은 김빛나리입니다. 반갑습니다.
첫 번째 온라인 문화교류강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첫 번째 강좌 주제는 ‘삼국(三國)’인데요. 이제부터 저와 함께 촉한(蜀漢)의 유적을 둘러보며, 삼국 이야기를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삼국이라고 하면, 여러분께서는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를 떠올리실 텐데요. 진수는 (중국 고대 서진西晉의) 유명한 역사가로, 말하자면 삼국지를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진수는 여러 가지 직업을 거쳤는데요, 장군 곁에서 문서를 관리하고, 비서나 수행원 등의 업무를 맡기도 했습니다.
당시 촉한 후기의 권력자였던 환관 황호(黃皓)는 독단과 전횡을 일삼았는데, 진수는 그가 하는 일에 동의하지 않다 여러 차례 핍박을 받고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三国·蜀汉

사실 당시 삼국의 역사서를 편찬한 사람은 진수 외에 다른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이 편찬한 삼국 시대 역사서는 모두 산실되고 진수의 『삼국지』만이 가장 온전하게 남아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진수가 쓴 『삼국지(三國志)』를 『사기(史記)』와 『한서(漢書)』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위치에 두었고, 후대의 사람들은 진수가 쓴 삼국의 정사(正史)를 가장 많이 읽게 되었습니다.
진수가 살아 있을 때, 그의 책은 그다지 유명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진수의 책이 이렇게 큰 영향력을 지니게 된 것은 그의 풍부한 경험과 많은 관련이 있습니다. 그는 일터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모두 작품 속의 풍부한 소재로 축적해 두었습니다.
특기할 만한 것은, 그는 서진(西晉) 왕조에서 공식 문서를 관리했고, 그러면서 여러 가지 역사 자료들을 읽고 수집할 좋은 기회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그의 경험은 우수한 삼국의 정사를 쓰게 되는 중요한 원인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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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223년 유비(劉備)가 세상을 떠나 성도(成都), 즉 청두의 혜릉(惠陵)에 안장됩니다. 지금 PPT로 보고 계신 사진이 바로 유비를 기념하는 한소열묘(漢昭烈廟)입니다.
서진 시대 즈음에 백성들이 제갈량(諸葛亮)을 기념하기 위해 한소열묘 옆에 무후사(武侯祠)를 짓습니다.
이후 명나라 때의 촉왕(蜀王) 주춘(朱椿)은 새롭게 이 두 사당을 함께 지었는데, 이것이 오늘날 성도에 있는 무후사입니다. 이곳은 또한 중국 유일의, 군주와 신하가 함께 모셔진 사당이기도 합니다.

민국 시기의 시인 추로(鄒魯)는 그의 시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상인방(문 위 부분)에 소열묘라 크게 써 있는데, 세상 사람은 모두 무후사라 한다; 명성과 공훈에서 비롯한 것이니, 승상의 공 높고 백 세대가 기억한다.”

이는 제갈량이 역사적으로 많은 공적을 세운데다 인품까지 빼어나 백성들이 높이 우러러보기 때문에 사람들이 군신 사이의 예의를 엄격하게 구분짓지 않고, 모두가 ‘무후사’라고 부른다는 뜻입니다.
청두, 즉 성도의 무후사 외에, 중국 대륙에는 비교적 중요한 무후사가 두 곳 더 있습니다.
하나는 섬서성(陝西省) 한중시(漢中市) 면현(勉縣)의 무후사입니다. 성도의 무후사보다 더 이른 시기인 서기 263년 유선(劉禪)의 명령으로 세워졌습니다. 이 무후사는 제갈량이 북벌(北伐)에서 세상을 떠난 정군산(定軍山) 아래, 제갈량의 묘인 무후묘(武侯墓)와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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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는 남양(南陽)의 무후사로, 하남성(河南省) 남양시(南陽市) 와룡강(臥龍崗)에 있습니다. 위진(魏晉) 시기에 처음 지어져 18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곳입니다. 유비가 ‘삼고초려(三顧草廬)’를 했던 그 곳, 제갈량이 밭을 갈던 남양에 자리하고 있죠. 남송(南宋) 소흥(紹興) 8년(1138년), 악비(岳飛)는 금나라를 상대로 한 북벌 중 남양의 무후사를 지날 때 송나라 고종(高宗)과 금나라의 화의를 알게 되어 비분의 눈물을 흘리며 제갈량의 전(前)·후(後) 「출사표(出師表)」를 베껴 썼습니다.
서기 809년(당唐 헌종憲宗 원화元和 4년)에 이르러 무원형(武元衡)이라는 절도사가 부하를 거느리고 무후사에 제사를 지내러 와서, 그의 제갈량에 대한 숭배와 존경의 마음을 표시하고자 당시 절도사 장서기(掌書記, 오늘날 중국에서는 성장省長의 기밀담당비서에 해당)인 배도(裴度)에게 명령하여 한 편의 글을 쓰도록 하고, 이를 비문으로 새겨 제갈량을 기념하였습니다. 지금 PPT로 보시는 당비(唐碑)입니다.
배도는 글 첫머리에 이렇게 씁니다. “도(度)는 옛 역사를 읽으

며 과거의 뭇 철인을 구하매, 혹자는 임금을 섬기는 절개를 지녔으나 나라를 세울 만한 재주는 없고, 입신의 방도를 얻었으나 사람을 다스리는 기술은 없었다. 네 가지를 모두 갖추어, 겸하여 그를 행하는 것은, 곧 촉의 승상 제갈 공 그 사람이다.” 

뜻은 이러합니다: 나 배도는 많은 역사서를 읽으며 덕과 재주를 지닌 여러 사람들을 발견했다. 그 중 어떤 이는 신하로서 군주를 대하는 충성스러운 품성과 덕을 갖추었으나 군주를 도와 혼란한 시국을 관리할 재능은 없었다. 어떤 이는 어떻게 사람을 대하고 일을 처리할지를 알고 있었으나, 백성을 관리할 책략과 능력은 모자랐다. 만약 이 네 가지 미덕을 겸비한데다 이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한 이가 있다면, 바로 촉한의 승상 제갈량뿐이다!”
먼저 제갈량에게는 군주를 섬기는 절개가 있었습니다.
제갈량이 세상에 나와 일하고자 했을 때, 조조(曹操)는 이미 천자를 손에 넣어 천하의 제후를 호령하는 방식으로 당시 3분의 2의 영토를 점령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유비의 세력은 아주 미약했지요. 이런 상황에서 제갈량은 망설임 없이 유비의 진영에 합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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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유비를 보좌하고 또한 유비의 아들 유선을 마음을 다해 보필하다 서기 234년 북벌의 전방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죽기 직전까지 제갈량은 늘 나라를 위해 전심전력을 다했는데 그가 가장 존경받는 것이 이 부분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후손 또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다음으로 제갈량에게는 나라를 세울 정도의 대단한 능력이 있었습니다.
제갈량이 유비 진영에 합류했을 때, 유비의 세력은 아직 약했고 군사의 수 또한 적었으며 장수 또한 관우(關羽)와 장비(張飛), 조운(趙雲)뿐이었습니다.
제갈량의 ‘융중(隆中) 대책’을 따라, 단 14년만에 유비는 천하 삼분의 일의 패주가 되었고, 또한 서기 221년, 성공적으로 촉(蜀)나라(오늘날의 성도)에 새로운 나라를 세웁니다. 유비의 성공은 제갈량의 지혜와 뗄 수 없는 관계였습니다.
지금 보시는 이 유비상은 무후사에서 모시는 가장 큰 인물상으로, 머리에 쓴 것은 ‘천평면관(天平冕冠)’이고, 입은 것은 황포(黃袍)이고,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조천규옥(朝天圭玉)’이며, 모습은 매우 인자해 보이는 제왕의 상입니다.

유비상 왼쪽에 있는 것은 손자 유심(劉諶)의 상입니다.
그런데 왜 유비 손자의 상은 세우고 아들 유선의 상은 세우지 않았을까요?

서기 263년 위(魏)나라 대군이 촉나라를 공격해 오자, 유선은 이 상황을 보고 투항하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유심은 이를 알고 유선에게 촉나라의 병사들과 함께 적에 저항해야 한다고 계속 권합니다. 그러나 유선은 등애(鄧艾)에게 투항하고 말죠.
유심은 유선이 적에게 항복하는 것을 보고 나라가 망했으니 더는 희망이 없다고 여겨, 집에 돌아가 자신의 아내와 아들을 죽이고 소열묘로 가 울며 고한 후 스스로 목숨을 끊어 순국하였습니다.
유선은 항복한 후 낙양(洛陽)에 안치됩니다. 어느 날 사마소(司馬昭)가 유선을 청하여 식사를 하는데, 연회 자리에 많은 오락과 볼거리를 준비했습니다. 사마소가 유선에게 아직도 촉나라를 마음에 두고 있는지 묻자 유선은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말합니다: “이곳이 즐거우니, 촉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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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나온 말이 “樂不思蜀[lè bù sī Shǔ]”로, ‘안락하여 고향에 돌아가는 것을 잊다(탐닉하여 본분을 잊다)’는 뜻입니다. 후세 사람들은 유선의 이런 “안락하여 고향(촉나라)에 돌아가는 것을 잊은” 모습을 매우 못마땅히 여겨 유선의 상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유비의 유언은 말로는 쉬워도 제갈량이 정말로 따르기에는 대단히 어려웠습니다.
왜냐하면, 예로부터의 종법은 맏이를 우두머리로 세우는 것이었고, 유선이 아무리 나약하고 무능해도 유비의 적장자였기에 이치에 따르면 응당 유선을 다음 임금으로 세워야 했습니다.
그러지 않고 멋대로 황제를 바꾼다면 당시 조정에 동요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았고, 제갈량 스스로 임금이 된다면 더 말할 것도 없었겠지요.
비록 제갈량에게 지도자의 재능과 실력이 있다 해도 대의명분에 어긋나고 이치에도 맞지 않으니, 제갈량은 자연히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사람들은 예로부터 제갈량을 일컬어 주군을 섬김에 있어 충성심과 지조를 굳게 지킨 사람이라 하는데요, 그는 분명 자신의 도덕과 양심을 배반하고 유비의 신임을 배신하는 일을 할 수 없었을 겁니다.

유비는 죽음을 맞기 전 특별히 제갈량을 붙들고 말했습니다. “만약 적자가 보필할 만하면 돕고, 재주가 모자란다면 그대가 나서 주시오.” 즉 맏아들 유선에게 황제가 될 만한 능력이 있다면 그를 보좌하고, 능력이 모자란다면 제갈량이 스스로 황제가 되어도 된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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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청두) 무후사에 있는 관우의 이 조각상은 높이 2미터 정도로 무척 엄숙한 표정을 하고 있습니다. 유비 진영에서 가장 중요한 장수로서 관우는 매우 충직했고 전투에서도 대단히 용맹했습니다. 그는 언제나 유비와 함께했죠. 어떤 이는 후한 재물로 그를 꾀었지만 관우는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많은 책을 읽고 이치를 깨우쳤고, 전장에서는 용맹하게 적을 쓰러뜨렸으며, 번성(樊城)에서 우금(于禁)을 붙잡고 방덕(龐德)을 베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줄곧 후세 사람들에게 전해지며 칭송받고 있습니다.

서기 200년(건안建安 5년) 조조가 출병하여 유비를 공격하고, 유비는 패하여 원소(袁紹)에게 몸을 의탁하게 됩니다. 전란 속에서 유비와 관우는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고 관우는 두 형수를 보호하기 위해 조조에게 투항해야 했습니다.
조조는 관우를 소중히 여겨 그를 자신의 군대에 들어오게 하고 싶어했고, 한수정후(漢壽亭侯)라는 관직에도 봉했습니다.

하지만 형님 유비와 함께한다고 맹세한 관우는 조조 진영에 머무를 수 없다며, 그러나 조조의 은혜에 보답하고 나서야 떠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훗날 조조와 원소의 백마(白馬) 전투 중 관우는 조조 군을 위해 원소 군의 대장 안량(顔良)을 참살했습니다. 조조의 후은에 보답한 후, 관우는 조조가 보낸 한수정후의 인(印)과 금은보화를 모두 봉인해 놓고 두 형수를 모시고 막아서는 적들을 물리치며 갖은 고난 끝에 유비 곁으로 돌아옵니다.
관우의 일생은 무엇이 충의인지를 알려주는 삶이었습니다. 그 충의는 재화의 유혹에 굴하지 않는 주군에 대한 충성인 한편, 인정과 의리를 지닌 보은의 마음으로, 자신에게 은덕을 베풀었다면 원수나 적이라 해도 관우는 반드시 보답했습니다.

평소 여러분에게 익숙한 관우의 이미지는 대개 대춧빛 붉은 얼굴에 손에는 큰 칼을 들고 있는 모습인데, 여기선 왜 온몸에 금을 입히고 머리에는 면류관을 쓴 제왕의 모습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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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그가 충의 때문에 역대 많은 제왕들로부터 봉작을 받은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관우의 충의가 후세에 미친 영향은 매우 커서, 후대 봉건 통치자들은 그를 적극 추앙하고 끊임없이 작위를 내리며 그를 충신의 모범으로 삼아 신하들로 하여금 왕실에 충성을 다하도록 격려했습니다.
명(明)나라 만력(萬曆) 42년에는 이미 민간의 백성과 정부로부터 관제야(關帝爺)로 봉해졌는데 그 봉호는 곧 ‘남천문(南天門) 삼계(三界) 진위(震威) 무원강마대제(撫遠降魔大帝) 관성제군(關聖帝君) 입니다.

역사적으로 장비의 큰 목소리에 대해 여러 기록이 있는데, 원래 있던 기초적인 내용에 후대 사람들이 묘사를 덧붙여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을까요? 당시 유비는 패전한 후 장비를 보내 후방을 엄호하게끔 했고, 장비는 단신으로 당양교(當陽橋)에 다다랐다고 합니다. 당양교에 도착하여 첫 번째로 한 일은 다리를 끊은 것인데, 즉 미리 다리를 끊은 것이지 고함 한 번으로 끊은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리를 끊은 후 장비는 눈을 부릅뜨고 다리 목에서 말했습니다: “내가 바로 장비다. 누구든 불복하는 자가 있다면 강을 건너와 일대일로 붙어서 누가 더 센지 겨뤄 보자.
이렇게 나오자 강 맞은편의 조조군은 머뭇거렸는데, 일단 장비가 이미 다리를 끊어 놓아 건너가기 쉽지 않았고, 다음으로 그 모습을 보니 대장의 풍모라 모두 감히 치고 나아가 싸우려 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장비는 당양교에서 성공적으로 조조 군을 저지하고 유비가 순조롭게 도망칠 수 있도록 시간을 벌 수 있었습니다. 

다음으로 장비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유비, 관우, 장비 삼형제는 무척 사이가 좋았고, 관우와 장비는 어디에 가든 유비 좌우에 있었습니다. 장비 또한 유비 곁에서 많은 공로를 세웠습니다.
여러분, 장비가 장판파(長坂坡) 전투에서 커다란 목소리로 적군을 격퇴한 것도 기억하시나요? 이어서 장비의 큰 목청에 대해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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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조운, 조자룡에 대해 얘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서기 208년, 당양 장판파에서 조운은 단기로 적진에 뛰어들어 감(甘) 부인과 유선을 구했습니다. 유비가 한중을 쟁취했을 때, 그는 계책을 써서 공영계(空營計)로 조위(曹魏)의 추격병을 물리쳤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유비는 “자룡은 온 몸이 담력 그 자체로다”라고 칭찬했습니다.

조운은 많은 삼국지 애호가들의 마음 속에서 이 그림처럼 백마를 타고 은빛 창을 든 위풍당당한 소년 장수, 잘생기고 멋있는 남자로 그려지는 인물이지만, 우리가 보고 있는 조운의 상은 전형적인 퇴직 노(老)간부의 이미지로, 문관 복식을 입고 있으며 수염과 머리가 하얗게 세어 있습니다.
사실 삼국지에 익숙한 여러분은 이해하실 텐데요, 삼국 시기 장군이란 힘든 일이라 천수를 누린 대장은 몇 되지 않습니다. 삼국연의(三國演議)만 놓고 봐도, 여포(呂布)는 교살당했고 관우와 장비 두 사람은 목이 잘렸습니다. 마초(馬超)는 47세에 불운한 삶을 마감했고, 황충(黃忠), 장료(張遼), 서황(徐晃)은 모두 화살에 맞아 죽었습니다. 진정 피비린내 나는 전장을 누비면서도 천수를 누린 이는 조운 한 사람뿐입니다. 여기서 조운의 상이 노인의 이미지인 것은 그의 선종에 대한 최대한의 표창입니다.

마지막으로 촉한의 이야기 두 가지를 해보려 합니다. 먼저 삼고초려 이야기부터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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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도대전(官渡大戰) 전에 조조는 유비를 쳐서 물리쳤고 유비는 유표(劉表)에게 몸을 의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남의 수하가 되는 것을 기꺼워하지 않았던 유비는, 자신의 대업을 이루고자 여기저기 훌륭한 군사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유비는 유명한 모사(謀士) 사마휘(司馬徽)에게 가르침을 청했고 사마휘는 그에게 제갈량을 추천합니다. 유비가 대단히 신임하는 부하 서서(徐庶)는 유비에게 융중에 제갈량이라는 기재(奇才)가 있으며 그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천하를 얻을 수 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유비는 듣자마자 눈이 번쩍 뜨여 급히 말했습니다. “좋다, 그럼 그대가 어서 그를 데려오거라.” 이에 서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재주 있는 사람은 장군께서 직접 가셔서 모셔와야 성의를 보일 수 있을 겁니다.”라고 말합니다.
유비는 사마휘와 서서가 모두 이렇게 제갈량을 숭배하는 것을 보고 관우와 장비와 함께 예물을 가지고 융중에 가서 예를 갖춰 제갈량을 방문하려 했습니다.
그들이 와룡강에 다다랐을 때, 하필 제갈량은 방금 전 출타한 참이었고, 시동은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유비는 돌아갈 수밖에 없었죠.
얼마쯤 시간이 지나 유비, 관우, 장비는 다시 예방을 준비하여 가는데, 이 때는 마침 겨울이라 날씨가 매우 추웠고 도중에 갑자기 큰 눈이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장비는 유비에게 돌아갔다가 날씨가 좀 좋아지면 다시 오자고 권하려 했지만 유비의 뜻은 매우 확고했고, 세 사람은 눈을 무릅쓰고 다시 제갈량의 집에 도착합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제갈량은 이 때 친구와 출타하고 없었습니다.

연달아 두 번이나 제갈량을 만나지 못하자 관우와 장비는 참지 못하고 유비에게 그만 포기하자고 분분히 말했지만 유비는 고개를 흔들며 참을성 있게 두 형제들을 설득했습니다.
눈 깜짝할 새 시간이 또 흐르고 유비는 좋은 날을 골라 다시 융중으로 갔습니다. 이번에는 제갈량이 집에 있었지만, 마침 낮잠을 자는 중이었습니다.
유비는 관우, 장비를 문 밖에서 기다리게 하고, 자신은 계단 아래 조용히 서 있었습니다. 몇 시진이 지나 서 있는 유비의 두 발과 온몸에 힘이 빠질 때쯤에야 제갈량은 깨어났고, 유비는 제갈량이 깨어난 것을 보고 서둘러 천하를 평정할 방법을 가르쳐 달라 청합니다.
제갈량은 유비에게 천하의 형세를 분석하며 말합니다. “북쪽은 천시(天時)를 차지한 조조에게 양보하고, 남쪽은 지리(地利)를 차지한 손권에게 양보하고, 장군은 인화(人和)를 점하시어, 서천(西川)을 취해 대업을 일으켜 조조, 손권과 정족지세(鼎足之勢), 즉 세 다리 솥과 같은 형세를 이루십시오.” 유비는 듣고 매우 탄복하여 그의 도움을 구하고, 제갈량은 승낙합니다.
이로부터 제갈량은 전심전력으로 유비를 보좌하여 유비의 세력을 점점 강대하게 키우고, 삼국 시기 천하를 삼분한 패주 중 한 명으로 만들어냅니다.

이어서 제갈량의 ‘공성계空城計’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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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은 위나라가 촉나라의 전략적 요충지인 서성(西城)을 지키는 군사 수가 일 만에 못 미칠 정도로 적다는 것을 알고, 대장 사마의(司馬懿)의 인솔 하에 십수 만의 군대를 파견하여 공격하게 했습니다.
촉나라는 위나라 군대가 서성으로 몰려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바짝 긴장했습니다. 일만 사병으로 십 수만의 적을 상대하는 것은 달걀로 바위 치기라 실패할 것이 뻔했습니다. 그러나 군대를 옮겨 집결하여 군사수를 늘릴 여유도 없었고, 서성은 아주 위험한 상황에 처했죠. 모두는 책략이 뛰어난 군사 제갈량에게 희망을 걸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갈량은 오랜 숙고 끝에 비교적 완벽한 계책을 하나 생각해냅니다. 그는 성 안의 백성과 사병들을 모두 철수시켜 잠시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킨 뒤 성문을 크게 열고 적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위나라 대장 사마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를 이끌고 서성을 포위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많은 사병이 지키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 서성의 문은 활짝 열려 있고 성벽 위에도 지키는 병사 하나 보이지 않았으며, 늙은이 하나가 성문 앞에서 바닥을 쓸고 있었습

* 참고문헌목록:
[1] 진수(陳壽) 저, 배송지(裵松之) 주석, 『삼국지(三國志)』, 중화서국, 1959
[2] 려동방(黎東方) 저, 『삼국을 상세히 말하다(細說三國)』, 상해인민출판사, 2000

성문을 열고 금을 타는 제갈량을 마주하고, 노회한 장군 사마의는 잠시 어찌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는 성 안에 필시 수많은 군사가 매복해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이 때 성루에서 흘러나오던 완만한 금의 가락이, 폭풍우가 몰아칠 것처럼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마의는 들을수록 심상치 않아서, 이것이 제갈량이 군대를 동원해 반격하려는 신호가 아닌지 의심하여 급히 철수를 명령했습니다.
위나라 군대는 재빨리 후퇴했고, 이렇게 촉나라의 서성은 아무 것도 잃지 않고 안전하게 위기를 넘겼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갈량의 유명한 “공성계(空城計)”입니다.
오늘 제 강연은 여기서 마칩니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습니다.

巴蜀文化系列讲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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